표준편차는 나에게 2 가지를 상기시켜 준다.
세상은 어디를 봐도 다양한 것들이 존재 한다는 것과, 항상 중앙의 일반적인 다수가 존재 한다는 것.
그 분포의 다양한 값들은 수많은 물건들이, 생명들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로서 세상이 어떤 특정한 물건, 생명, 사람에 의해 정의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고, 어떤 식의 '정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다양성을 규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안된다기 보다는 불가능할 것이다. 표준오류조차 일반적인 표준편차를 따르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일반적인 다수. 중앙 부근에 몰려있는 그 볼록한 부분은 세상 어디를 봐도 비슷하게 중앙으로 몰려있는 다수를 상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다수의 강력한 힘을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기껏해야 기성복을 만들거나 표준을 잡아서 대량생산을 하는데 사용해 온 그 힘은, 사실 켜켜히 쌓인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는 힘이다. 비슷한 힘은 더할 수 있고, 대량의 힘을 더하면 정말로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그 힘을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더 빨리 데려올 수가 있다.
사실 사회라는 시스템이 다양성을 짓밟을 수 있는 힘이 바로, 다수의 더해진 힘이기도 했다.
어쨌건, 다양성을 존중하고, 강력한 다수의 힘을 옳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 그것이 표준편차가 말하는 세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16년 1월 26일 화요일
2015년 10월 10일 토요일
고개를 들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지만, 어린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병충해의 영향일 것이다.
난 나보다 젊은 나이의 사람이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낮추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경험상 어떤 비하의 생각이나 발언이 일을 더 쉽게 해 주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낸 사람은 그야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수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도 힘들 일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며 성공한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니까. 아니면, 그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한참 모자라는 사람도 해 낼 수 있는 일이거나.
익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마 세상이 그 정도로 썩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힘이 들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봐도 좋다. 우울할 때에는 우울한 음악이 효과가 있다. 하지만, 세상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당신이 누구든 간에, 자신의 능력을 하수구에 처박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쉽사리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익은 벼에 비유하는 사람만큼 거만한 경우가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자신이 충분히 익으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을 믿고, 적어도 젊은 나이에 억지로 스스로를 낮추려는 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은 비슷한 이유로 주변의 사람들을 낮추려고 시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우리의 주변에는 자신감이라는 에너지가 더 필요한 때이다.
자신에게도 주변의 사람에게도 믿음을 가지고 '된다'고 해야 한다.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애 마냥 걱정하거나 신경쓰는 대신에 믿고 기다려야 한다. 정말로 자신의 알량한 체면이나 동정 따위로 자신이나 주위 사람의 가능성을 죽이고 있는게 아닌지 생각 해 보아야 한다.
감히 보호나 위로를 하려들지 말고, 고개를 들어야 한다.
고개를 숙여야 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익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니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 고개를 숙여야 벼가 익는 것은 아니다.
난 나보다 젊은 나이의 사람이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낮추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경험상 어떤 비하의 생각이나 발언이 일을 더 쉽게 해 주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낸 사람은 그야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수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도 힘들 일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며 성공한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니까. 아니면, 그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한참 모자라는 사람도 해 낼 수 있는 일이거나.
익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마 세상이 그 정도로 썩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힘이 들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봐도 좋다. 우울할 때에는 우울한 음악이 효과가 있다. 하지만, 세상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당신이 누구든 간에, 자신의 능력을 하수구에 처박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쉽사리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익은 벼에 비유하는 사람만큼 거만한 경우가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자신이 충분히 익으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을 믿고, 적어도 젊은 나이에 억지로 스스로를 낮추려는 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은 비슷한 이유로 주변의 사람들을 낮추려고 시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우리의 주변에는 자신감이라는 에너지가 더 필요한 때이다.
자신에게도 주변의 사람에게도 믿음을 가지고 '된다'고 해야 한다.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애 마냥 걱정하거나 신경쓰는 대신에 믿고 기다려야 한다. 정말로 자신의 알량한 체면이나 동정 따위로 자신이나 주위 사람의 가능성을 죽이고 있는게 아닌지 생각 해 보아야 한다.
감히 보호나 위로를 하려들지 말고, 고개를 들어야 한다.
고개를 숙여야 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익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니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 고개를 숙여야 벼가 익는 것은 아니다.
2015년 5월 3일 일요일
현실정치
오직 바보만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겠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바보가 분명하다. 물론, 당원이 되고, 10만원 정도의 성금을 보내고, 원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당장에 뛰어들어도 되고, 현실정치이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그 이상 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는 방법은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 하며 모두 멀리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단지 모이기만 해도 이마에 불에 달군 표식을 찍어대는데(은유적으로다가...), 새누리당이 아닌 다른 당원이 되면,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과장법으로다가...)?
한 두 사람이 말했을 때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극히 억눌린 나라라는 것을 인정해야 겠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야 겠다.
아무리 그저 그런 삶을 살다 가면 그만이라지만, 소시오 패스도 나름 쓸 구석이 있는 것 처럼, 바보도 목숨을 내어 놓고 정치에 뛰어드는 데에는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내 이름과 '열사'같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으므로, 시위/집회에 참여하는 것 보다는 내가 잘 하는 쪽으로 시작을 하려고 한다. 정치 사이트 같은 것을 만듦으로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의 말을 하기가 힘든 것이 현재의 정치이다. 그저 바람처럼 떠 도는 찌라시가 여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실정치'나 '정치참여'라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 뛰어난 수 많은 사람들이 미친듯이 날뛰는 정신없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세상이고, 한국이기에. 나는 더 바보가 되어야 겠다.
난 더 이상 내 친구들이 '박근혜'나 '여당'이라는 한 마디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림자 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이왕이면 바보가 되어 보자.
...
여전히 새누리당 쪽을 더 지지하고 있는 개인적인 입장이 난처하기는 하지만, 논의가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묻히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정부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국민들을 모욕적인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보수주의자이자, 한국을 자랑스러워 했던 한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정치에 대해 말을 하는 것 조차 두려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며 정부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겠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바보가 분명하다. 물론, 당원이 되고, 10만원 정도의 성금을 보내고, 원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당장에 뛰어들어도 되고, 현실정치이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그 이상 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는 방법은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 하며 모두 멀리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단지 모이기만 해도 이마에 불에 달군 표식을 찍어대는데(은유적으로다가...), 새누리당이 아닌 다른 당원이 되면,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과장법으로다가...)?
한 두 사람이 말했을 때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극히 억눌린 나라라는 것을 인정해야 겠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야 겠다.
아무리 그저 그런 삶을 살다 가면 그만이라지만, 소시오 패스도 나름 쓸 구석이 있는 것 처럼, 바보도 목숨을 내어 놓고 정치에 뛰어드는 데에는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내 이름과 '열사'같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으므로, 시위/집회에 참여하는 것 보다는 내가 잘 하는 쪽으로 시작을 하려고 한다. 정치 사이트 같은 것을 만듦으로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의 말을 하기가 힘든 것이 현재의 정치이다. 그저 바람처럼 떠 도는 찌라시가 여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실정치'나 '정치참여'라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 뛰어난 수 많은 사람들이 미친듯이 날뛰는 정신없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세상이고, 한국이기에. 나는 더 바보가 되어야 겠다.
난 더 이상 내 친구들이 '박근혜'나 '여당'이라는 한 마디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림자 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이왕이면 바보가 되어 보자.
...
여전히 새누리당 쪽을 더 지지하고 있는 개인적인 입장이 난처하기는 하지만, 논의가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묻히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정부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국민들을 모욕적인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보수주의자이자, 한국을 자랑스러워 했던 한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정치에 대해 말을 하는 것 조차 두려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며 정부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눈이 나쁘다 하면,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느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앞에 어떤 사람이 앉았다.
"저기 날아가는 비행기가 KAL이었나요?"
"아, 눈이 나빠서 잘 못 봤습니다."
그는 내가 대답하자 마자 조용히 탁자에 있는 내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기 시작했다.
"왜 제걸 가져가세요?"
"아뇨. ... 전 가만히 있었는데요?"
...
아마도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보며 불같이 화내지 않는 것은,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친구들이 가끔은 나를 보며 혀를 찬다. 그렇지만 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나를 이용하려 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마음이 생기리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착한척 하거나 착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의 입장이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
내 어린시절, 가장 충격적인 깨닳음은 정말로 열심히 만들어 내고 메소드 연기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사기가 잘 통하는 상대는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혈을 기울인 완벽하게 논리적인 거짓말은 평범하고 멍때리는 사람을 속일 수 없었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나의 예가 '어린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믿는 사람을 속이기 어렵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전두엽이 최근에 발달한 부분이라면, 간뇌는 파충류때 부터 발달해 온 기관이다. 이성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우리의 동물적인 감각은 항상 위험신호를 보내 온다.
어쨌건, 그런 짓들(거짓말, 도둑질, 사기, 등)을 그만두고 순진한 양이 되었거나 탈을 쓴 이유는 사람의 말 보다는 사람의 감각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껴서이고, 상대방을 짧게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이다... 라고 하기는 어렸고,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
25년 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 이것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리 순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지나치게 선의로 곡해하지 않는다. 미안하게도, 나를 잘 아는 믿을 만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웃기도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대다수의 양의 탈을 쓴 사람들 역시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거나 곡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보면서도 웃어 넘기는 것일테다.
아... 물론 회사에서 계급으로 누르는 경우는 웃어 넘기고 싶지 않은데 참는 것이고.
로맨틱하지 못하게시리... 대단한 사기꾼도 대부분 대상을 이성적이고, 자신의 논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할 뿐이고, 우리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책임져야 할 작은 거짓말은 대부분 진심으로 넘어오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어린 사람들 만이 상대를 속이려 하고, 상대에게 속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음...
내일이면, 수 많은 거짓말 아티스트들이 나를 속이려 할 지도... 오해가 있었다면, 다시. 속이는 것을 모두 순식간에 정확히 파악하고 속아준다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마음을 속이며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고 하자. 그리고 단정적인 표현들은 내 의견의 일부분이고.
어느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앞에 어떤 사람이 앉았다.
"저기 날아가는 비행기가 KAL이었나요?"
"아, 눈이 나빠서 잘 못 봤습니다."
그는 내가 대답하자 마자 조용히 탁자에 있는 내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기 시작했다.
"왜 제걸 가져가세요?"
"아뇨. ... 전 가만히 있었는데요?"
...
아마도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보며 불같이 화내지 않는 것은,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친구들이 가끔은 나를 보며 혀를 찬다. 그렇지만 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나를 이용하려 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마음이 생기리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착한척 하거나 착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의 입장이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
내 어린시절, 가장 충격적인 깨닳음은 정말로 열심히 만들어 내고 메소드 연기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사기가 잘 통하는 상대는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혈을 기울인 완벽하게 논리적인 거짓말은 평범하고 멍때리는 사람을 속일 수 없었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나의 예가 '어린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믿는 사람을 속이기 어렵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전두엽이 최근에 발달한 부분이라면, 간뇌는 파충류때 부터 발달해 온 기관이다. 이성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우리의 동물적인 감각은 항상 위험신호를 보내 온다.
어쨌건, 그런 짓들(거짓말, 도둑질, 사기, 등)을 그만두고 순진한 양이 되었거나 탈을 쓴 이유는 사람의 말 보다는 사람의 감각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껴서이고, 상대방을 짧게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이다... 라고 하기는 어렸고,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
25년 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 이것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리 순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지나치게 선의로 곡해하지 않는다. 미안하게도, 나를 잘 아는 믿을 만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웃기도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대다수의 양의 탈을 쓴 사람들 역시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거나 곡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보면서도 웃어 넘기는 것일테다.
아... 물론 회사에서 계급으로 누르는 경우는 웃어 넘기고 싶지 않은데 참는 것이고.
로맨틱하지 못하게시리... 대단한 사기꾼도 대부분 대상을 이성적이고, 자신의 논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할 뿐이고, 우리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책임져야 할 작은 거짓말은 대부분 진심으로 넘어오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어린 사람들 만이 상대를 속이려 하고, 상대에게 속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음...
내일이면, 수 많은 거짓말 아티스트들이 나를 속이려 할 지도... 오해가 있었다면, 다시. 속이는 것을 모두 순식간에 정확히 파악하고 속아준다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마음을 속이며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고 하자. 그리고 단정적인 표현들은 내 의견의 일부분이고.
2015년 4월 6일 월요일
보편타당성은 타당하지 않다.
보편타당성은 타당성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아, 보편타당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현대의 사회가 이 보편타당성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어떠한 생각을 강요하는데 이를 사용하는데 있다.
'보편타당'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다'는 말인데, 이 일반성이 현대의 민주주의와 혼동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 옳은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비틀어 예를 들자면, 항상 깨끗이 손을 씻고,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하지만, 오지나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을 때는 타당하지 않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나쁜 일이지만, 상대를 위하거나 자신이 위급 할 때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낫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 봉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삶의 질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낫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 보면,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결국 더 큰 것은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상황에 좋은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살인도, 도둑질도, 배임과 횡령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더 옳은 경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그런 조그마한 일탈들로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보편타당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
난 도덕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이, 가장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놓았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로 시작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 아닌 상대방의 상황에서의 타당함을 먼저 생ᅟ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 장소와 기분,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해지지 않은 만큼 꾸준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비록 짧은 삶을 살아가지만, 살아 있기에, 변화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만나고 살아가기에, 그것에 가장 충실하는 방법은 변화에 따라 대응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다수의 의견이나 이전에 옳았던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무엇보다 같은 질문에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보편타당성이 옳은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과는 틀리게 글로 옮기다 보니 사회적인 동의를 구하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 같다.
나즈막히 정리하자면, '사회 대신 사람을 보라.' 고 말하고 싶다.
바로 주위에 있는 사람을,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말이다.
또 세상과 통계 대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분명 고려해야 할 대상이지만,
자신은, 살아온 시간 만큼 세상과의 경험을 정리해 온 결정체라고.
어쨌건, 가능하다면 보편타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보아, 보편타당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현대의 사회가 이 보편타당성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어떠한 생각을 강요하는데 이를 사용하는데 있다.
'보편타당'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다'는 말인데, 이 일반성이 현대의 민주주의와 혼동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 옳은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비틀어 예를 들자면, 항상 깨끗이 손을 씻고,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하지만, 오지나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을 때는 타당하지 않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나쁜 일이지만, 상대를 위하거나 자신이 위급 할 때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낫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 봉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삶의 질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낫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 보면,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결국 더 큰 것은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상황에 좋은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살인도, 도둑질도, 배임과 횡령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더 옳은 경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그런 조그마한 일탈들로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보편타당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
난 도덕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이, 가장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놓았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로 시작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 아닌 상대방의 상황에서의 타당함을 먼저 생ᅟ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 장소와 기분,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해지지 않은 만큼 꾸준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비록 짧은 삶을 살아가지만, 살아 있기에, 변화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만나고 살아가기에, 그것에 가장 충실하는 방법은 변화에 따라 대응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다수의 의견이나 이전에 옳았던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무엇보다 같은 질문에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보편타당성이 옳은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과는 틀리게 글로 옮기다 보니 사회적인 동의를 구하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 같다.
나즈막히 정리하자면, '사회 대신 사람을 보라.' 고 말하고 싶다.
바로 주위에 있는 사람을,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말이다.
또 세상과 통계 대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분명 고려해야 할 대상이지만,
자신은, 살아온 시간 만큼 세상과의 경험을 정리해 온 결정체라고.
어쨌건, 가능하다면 보편타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혼
물리적인 '혼'을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
소매치기가,
어떤 사람이 필사적으로 1년간을 모은 500만원을 가져가든,
친구들과 만나면 하루 술값으로 쓰는 사람의 500만원을 가져가든,
이 돈은 물질적으로 완전하게 같은 500만원이다.
아마도 소매치기가 어딘가 사용하는 곳도 같을 것이고, 이 돈의 운명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언듯 그럴듯해 보이지만, 상대방이 이 돈을 찾으려는 의지는 꽤 틀릴 것이고, 소매치기의 돈은 이 의지에 의해서 아주 약간의 확률로 다른 운명을 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소매치기가 도망을 치면서 쓰여지면서 조금은 다른 만남을 이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가고, 어렵게 번 돈은 어렵게 나간다고 한다.
무생물인 돈 조차 의지가 담기고 인연을 낳는다.
당연히 그 돈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벌었는가에 따라서 그 당사자에게는 더 많은 생각들이 담긴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의지 없이 돈을 버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2.
사람의 의지는 공유되고, 전달되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온 방법이 혈연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로 부터 자식에게로 많은 지식들이 전달되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 DNA로서 사람들의 의지는 전달된다고 본다.
생명체로서 형상이나 발달이나 방향성을 대다수 전달하는 것은 DNA쪽인 것이다.
그래서 겉모양새가 닮은 만큼 고집이나 생각이나 의지도 꽤 많이 닮아 있다.
여기에 어느 정도의 자신의 부모와 조상에 대한 생각을 자극시키면, 피로 전달받은 우리들의 의지는 보다 방향성을 확연히 한다.
나는 이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조상의 혼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를 다잡기 위해서.
물론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살아가면 조상들 보기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3.
국가와 민족에게 혼은 역사이다.
한민족이 반만년의 역사, 혹은 그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국민 한 명 한 명에게 큰 힘이 된다.
일제시대에 역사를 날조하느라 바빴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 한국인의 의지를 쉽게, 오래도록 꺽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가 닿지 못하는 먼 과거의 의지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단군으로부터, 혹은 한웅으로 부터 내려온 강한 의지가 결국 한국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산이 되어 우리들로 표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나에게 '혼'이란 '의지'이다.
아니, 피로 이어진 의지이고, 민족의 자부심으로 강화된 의지이므로, 의지보다 강한 의지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나를 받쳐주는, 다시 빛을 향해 걷고 뛰게 해 주는 밑바탕이다.
물론 나는 무교이며, 영혼을 믿지 않으며, 단일민족도 믿지 않고, 부모와의 관계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DNA를 믿고, 이어져 온 의지를 믿고, 내가 생각하는 혼의 힘과 의미를 믿는다.
나는 한국인이고, 제사를 좋게 생각하며, 생각을 가지고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다.
1.
소매치기가,
어떤 사람이 필사적으로 1년간을 모은 500만원을 가져가든,
친구들과 만나면 하루 술값으로 쓰는 사람의 500만원을 가져가든,
이 돈은 물질적으로 완전하게 같은 500만원이다.
아마도 소매치기가 어딘가 사용하는 곳도 같을 것이고, 이 돈의 운명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언듯 그럴듯해 보이지만, 상대방이 이 돈을 찾으려는 의지는 꽤 틀릴 것이고, 소매치기의 돈은 이 의지에 의해서 아주 약간의 확률로 다른 운명을 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소매치기가 도망을 치면서 쓰여지면서 조금은 다른 만남을 이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가고, 어렵게 번 돈은 어렵게 나간다고 한다.
무생물인 돈 조차 의지가 담기고 인연을 낳는다.
당연히 그 돈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벌었는가에 따라서 그 당사자에게는 더 많은 생각들이 담긴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의지 없이 돈을 버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2.
사람의 의지는 공유되고, 전달되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온 방법이 혈연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로 부터 자식에게로 많은 지식들이 전달되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 DNA로서 사람들의 의지는 전달된다고 본다.
생명체로서 형상이나 발달이나 방향성을 대다수 전달하는 것은 DNA쪽인 것이다.
그래서 겉모양새가 닮은 만큼 고집이나 생각이나 의지도 꽤 많이 닮아 있다.
여기에 어느 정도의 자신의 부모와 조상에 대한 생각을 자극시키면, 피로 전달받은 우리들의 의지는 보다 방향성을 확연히 한다.
나는 이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조상의 혼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를 다잡기 위해서.
물론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살아가면 조상들 보기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3.
국가와 민족에게 혼은 역사이다.
한민족이 반만년의 역사, 혹은 그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국민 한 명 한 명에게 큰 힘이 된다.
일제시대에 역사를 날조하느라 바빴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 한국인의 의지를 쉽게, 오래도록 꺽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가 닿지 못하는 먼 과거의 의지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단군으로부터, 혹은 한웅으로 부터 내려온 강한 의지가 결국 한국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산이 되어 우리들로 표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나에게 '혼'이란 '의지'이다.
아니, 피로 이어진 의지이고, 민족의 자부심으로 강화된 의지이므로, 의지보다 강한 의지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나를 받쳐주는, 다시 빛을 향해 걷고 뛰게 해 주는 밑바탕이다.
물론 나는 무교이며, 영혼을 믿지 않으며, 단일민족도 믿지 않고, 부모와의 관계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DNA를 믿고, 이어져 온 의지를 믿고, 내가 생각하는 혼의 힘과 의미를 믿는다.
나는 한국인이고, 제사를 좋게 생각하며, 생각을 가지고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다.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자유와 사회
자유.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있는 것. -- 위키백과
많은 사람에게 자유는 실패나 도태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달콤하고, 꿈과 같으며, 그 자체로 성공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회에 속해있다 보면, 자신이 자유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오해하고 착각한다.
그래서 나의 경우는 자신이 자유로운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한 3~4일 정도 휴가를 얻어서,
핸드폰과 컴퓨터, 심지어 사랑하는 책과 시계 마저도 모두 없애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서성이는 것이다.
자신의 가슴과 머리 속에서 피어오르는 첫 번째 것이 가장 자신을 구속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또 그 다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자신이 자유롭지 않음을 느낀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처리해야 할 회사 일들과, 자신이 일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나,
그로 인해 가족과 친구와 친척들과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자신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릴 것이다.
그것들은 영원히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걱정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자유롭다면,
생각은 고요하고, 마침내 움직였을 때는 뭔가 스스로를 심심하지 않게 하는 많은 공상이 되거나,
생각이 자신을 스스로 정리하고, 저 멀리 있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할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이렇게 구분한다.
---------------------
사회.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라고 착각들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고작 인간의 한 측면(성질)을 고찰했을 뿐이다.
인간은 사회를 이룬다.
하지만 "사회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 자유를 제약 당하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사회가 자신의 자유를 제약한다면, 그 사회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롭지 않은 개인은 그 사회를 적대시 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반 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나, 사회 부적응자들의 문제가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는 사회의 강압에 있고, 해답은 자유에 있다.
자신이 속한 사회들을 하나씩 느껴 보라.
한국, 회사, 친족과 가족, 친구들.
자신이 느끼는 압박이 어디에서 왔는지 명백해 지지 않는가?
그렇지만, 자유는 사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엄청난 두려움을 몰고 온다.
사회라는 것은 마약과도 같아서, 지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지만, 없어진다는 상상 만으로도 더 할 나위 없는 공포심을 인간에게 준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자유는 사회와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자유로운 사람은 사회에 연연하지 않고, 수 많은 사회를 마치 투명인간 처럼, 혹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처럼 오고 갈 수 있다.
...
물론, 사회쪽 구성원은 그를 잃었다고,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겠다.
혹은 사회에 타격이 있는 경우도 많고.
...
아무튼, 화제를 급전환 해서,
자유와 사회는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으므로,
자유를 덜 침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노력으로, 우리의 자유를 지키고, 반 사회적인 사람들과 부적응자를 줄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으니,
먼저 가족부터 살피자. 누가 소외 되었으며, 누가 자유를 잃고 신음하고 있는가?
그 다음은 친구와 친척들을 살피자. 한국을 살펴 보고, 세계를 살펴보자.
모든 사회에 자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
사실은, 내 자유를 사회가 침해하고 있으며, 그 증거들을 열거하고, 시덥잖은 논리를 펼까 생각했는데,
조금 오버인 것 같아서 자유와 사회의 화해를 청해 보았다.
소위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의 압박으로 '자유'를 알거나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기에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자유란 달콤하고, 꿈과 같다.
내·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있는 것. -- 위키백과
많은 사람에게 자유는 실패나 도태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달콤하고, 꿈과 같으며, 그 자체로 성공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회에 속해있다 보면, 자신이 자유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오해하고 착각한다.
그래서 나의 경우는 자신이 자유로운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한 3~4일 정도 휴가를 얻어서,
핸드폰과 컴퓨터, 심지어 사랑하는 책과 시계 마저도 모두 없애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서성이는 것이다.
자신의 가슴과 머리 속에서 피어오르는 첫 번째 것이 가장 자신을 구속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또 그 다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자신이 자유롭지 않음을 느낀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처리해야 할 회사 일들과, 자신이 일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나,
그로 인해 가족과 친구와 친척들과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자신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릴 것이다.
그것들은 영원히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걱정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자유롭다면,
생각은 고요하고, 마침내 움직였을 때는 뭔가 스스로를 심심하지 않게 하는 많은 공상이 되거나,
생각이 자신을 스스로 정리하고, 저 멀리 있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할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이렇게 구분한다.
---------------------
사회.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라고 착각들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고작 인간의 한 측면(성질)을 고찰했을 뿐이다.
인간은 사회를 이룬다.
하지만 "사회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 자유를 제약 당하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사회가 자신의 자유를 제약한다면, 그 사회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롭지 않은 개인은 그 사회를 적대시 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반 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나, 사회 부적응자들의 문제가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는 사회의 강압에 있고, 해답은 자유에 있다.
자신이 속한 사회들을 하나씩 느껴 보라.
한국, 회사, 친족과 가족, 친구들.
자신이 느끼는 압박이 어디에서 왔는지 명백해 지지 않는가?
그렇지만, 자유는 사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엄청난 두려움을 몰고 온다.
사회라는 것은 마약과도 같아서, 지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지만, 없어진다는 상상 만으로도 더 할 나위 없는 공포심을 인간에게 준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자유는 사회와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자유로운 사람은 사회에 연연하지 않고, 수 많은 사회를 마치 투명인간 처럼, 혹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처럼 오고 갈 수 있다.
...
물론, 사회쪽 구성원은 그를 잃었다고,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겠다.
혹은 사회에 타격이 있는 경우도 많고.
...
아무튼, 화제를 급전환 해서,
자유와 사회는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으므로,
자유를 덜 침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노력으로, 우리의 자유를 지키고, 반 사회적인 사람들과 부적응자를 줄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으니,
먼저 가족부터 살피자. 누가 소외 되었으며, 누가 자유를 잃고 신음하고 있는가?
그 다음은 친구와 친척들을 살피자. 한국을 살펴 보고, 세계를 살펴보자.
모든 사회에 자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
사실은, 내 자유를 사회가 침해하고 있으며, 그 증거들을 열거하고, 시덥잖은 논리를 펼까 생각했는데,
조금 오버인 것 같아서 자유와 사회의 화해를 청해 보았다.
소위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의 압박으로 '자유'를 알거나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기에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자유란 달콤하고, 꿈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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