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6일 월요일

보편타당성은 타당하지 않다.

보편타당성은 타당성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아, 보편타당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현대의 사회가 이 보편타당성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어떠한 생각을 강요하는데 이를 사용하는데 있다.

'보편타당'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다'는 말인데, 이 일반성이 현대의 민주주의와 혼동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 옳은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비틀어 예를 들자면, 항상 깨끗이 손을 씻고,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하지만, 오지나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을 때는 타당하지 않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나쁜 일이지만, 상대를 위하거나 자신이 위급 할 때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낫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 봉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삶의 질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낫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 보면,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결국 더 큰 것은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상황에 좋은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살인도, 도둑질도, 배임과 횡령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더 옳은 경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그런 조그마한 일탈들로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보편타당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

난 도덕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이, 가장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놓았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로 시작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 아닌 상대방의 상황에서의 타당함을 먼저 생ᅟ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 장소와 기분,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해지지 않은 만큼 꾸준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비록 짧은 삶을 살아가지만, 살아 있기에, 변화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만나고 살아가기에, 그것에 가장 충실하는 방법은 변화에 따라 대응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다수의 의견이나 이전에 옳았던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무엇보다 같은 질문에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보편타당성이 옳은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과는 틀리게 글로 옮기다 보니 사회적인 동의를 구하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 같다.

나즈막히 정리하자면, '사회 대신 사람을 보라.' 고 말하고 싶다.
바로 주위에 있는 사람을,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말이다.
또 세상과 통계 대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분명 고려해야 할 대상이지만,
자신은, 살아온 시간 만큼 세상과의 경험을 정리해 온 결정체라고.

어쨌건, 가능하다면 보편타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