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4일 수요일

무상급식에 대해서

과연 충분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자식까지 무상급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난 학교를 다니면서 세상이 평등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친구들만큼 하면 주변 친구들 만큼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른을 넘기며 보아온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몇몇 친구들은 충분한 advantage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난 그들과 같은 선상에 있지 않았다.
내가 그들과 비슷해지기 위해서는 사실 더 많은 노력을 했어야 했고,
그들을 인식했어야 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랬다면 많은 결정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더 좋은 대학을 갔을거고, 그곳을 나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그 때도 그렇게 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세상을 평등하게 여긴 내게는 공허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만약 교육이라는 것이 현실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부분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조금 더 현실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난 전체 무상급식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집안이 어려우면 무상급식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는데, 그 과정을 없애버린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여 받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도움이 당연한 것이 되면,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모르고, 도와주지 않는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모든 아이들의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들 중 몇 퍼센트의 아이들은 분명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 그들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이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현실을 감추는 것일까?
그것은 좋은 교육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난 전체 무상급식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부모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해결해야 할 자식 급식비를 지원하는 것은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짐을 덜어주는 것은 자식들에 대한 보호의지를 오히려 약하게 만든다.
자식에 대한 관심을 줄인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인식도 잘못된 쪽으로 이끈다.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에 대한 차이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같이 자식이 없는 사람은 사실 돈이 아깝다.
왜 세금을, 복지를, 없는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대다수에게 사용해야 할까?
복지를 원하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쓸까?
돈의 크기의 문제보다, 낭비라는 측면이 돈을 아깝게 만든다.

그래서 난 전체 무상급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결국 오세훈시장의 "시민에게 물어보자"는 결국 미달되었고,
투표를 하러 간 사람들만 바보가 되었다.
사실은 투표를 생각조차 안한 사람들도 바보가 되었다.
의도적으로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

이제, 왜 전체 무상급식을 지지하는지, 그들의 생각을 더 들어보러 가야겠다.
그들의 생각이 충분히 나를 이해시켰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왕이면 한국 경제사정이 좋지 않을때에도 꾸준히 정책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뭐, 아직 법적인 문제는 남아 있지만서도...

2011년 8월 14일 일요일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의 리바이벌 곡은...
결국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노래를 정말 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의 연주와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들국화의 노래를 살리기는 불가능.
그렇다. 사실 노래를 그렇게 잘 불러 주어도, 나의 명곡들은 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원곡을 듣고야 마는 아쉬움은 어찌할 수 없다.

나가수가 계속 가면서 내가 정말 classic이라 생각하는 노래들이 점점 더 많이 나오고 있다.
젊은 이들은 "오~ 이런 노래도 있었나, 꽤 괜찮은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사실 조금 더 아는 노래를 하면 호응이 훨씬 좋기도 한데,
그 프로그램이 어찌 되었건, 나는 지켜주었으면 하는 boundary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들으며,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고,
들국화를 들으면서는 '이러면 안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충분히 훌륭하게 불러 주었지만,
마치, 시의 운율과 공백(?)을 무시한 듯한 느낌이라 내 귀가 투덜대고 있다.

나가수 보다 jam competition 비슷한 형식이면 좋을 것 같다.
(두개의 어울리지 않은 단어라...)

혹시 내가 바보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콩쥐팥쥐나 춘향전을 외국 버전으로 봐 보면 알 것이다.
아, 그럴 것 없이 life on mars라는 드라마를 미국판으로 보면 되겠다.
(원판은 영국판임)

굳이 나쁘진 않지만, "원치 않아"라는 느낌이 팍~~~ 하고 올 것이다.

음...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의문스러워 진다.
애 자꾸 삐딱선을 타는거니?

2011년 8월 10일 수요일

한일전이 아니었던 경기를 보고

음... 오랫만에 한일전 A매치라고 해서 daum에서 느린 windows를 참아가며 보았는데...
한일전이 아니었다.

아마도 '일본 A팀 연습경기 투어'(삿뽀로긴 하지만)라고 제목을 붙이면 될 것이다.
조광래 감독도, 박주영도, 이근호도, 구자철도 한일전이 연습경기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까먹은 듯 하다.

보통 한일전은 모두가 치열하다.
그것이 공식전이건, 친선전이고를 떠나서,
전력상 한국이 앞설 때도, 일본이 앞설 때도,
선수들의 머릿속에는 그 수 많은 압박 속에서도 '이겨야만 한다'는 의식이 있다.
그리고 '한일전'이라고 불리는 모든 시합에는 그 의식이 관중의 눈 앞에 보인다.

선수들의 불어난 몸값이나 화려해지고 미세해진 테크닉을 뒤엎는 그 투지가 바로 신들의 전쟁터와 같은 '한일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레스와 아테나가 서로 갈라져 양군을 응원하며 피로 낭자한 혈투를 벌이게 만들기에,
한일전의 한 골 한 골은 주옥과도 같고, 기억에 남는 멋진 골인 것이다.

오늘 경기는 그렇지 않았다.
피가 튀는 혈전속의 골이 아니라 일본의 여유로운 패스와 화려한 볼 컨트롤 속에 슬쩍 슬쩍 넣는 무난한 골들.
왠지 보면서 "오, 훌륭한 패스와 골이었어."라고 말하며 박수를 쳐 주고 싶은 골이었다.
한국의 아까웠던 장면들은 분명히 격렬해진 한국 선수들의 투지가 조금은 엿보이기도 했으나,
그건 아마도 3: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생겨난 "어, 한일전인데 이렇게 지면 난리날텐데..."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 처럼 보이지, '한일전'에서 나온 투지는 아니었다.
만일 구자철이 '한일전'을 뛰었다면, 틀림없이 골은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한일전'이다.

게임에서 진 것도 그렇게까지 분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왠지 '한일전'에서 진 것이 아니라, 그냥 게임에서 진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이 '한일전'을 실망스럽게 한 것은 몇 번 보았지만(이 경우, 일본 축구를 욕한다), 한국이 '한일전'을 이처럼 엉망으로 만든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아마, 일본에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한일전'을 망친 한국 축구를 개탄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조광래 감독에게 책임을 묻고 싶을 정도이다.
주장으로서 한일전의 각오를 이끌어 내지 못한 박주영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다.

일본에 메시와 호날두가 껴 있대도, 스코어 차가 5:0 이라고 해도 치열해야 마땅할 '한일전'을 다시는 한국이 망쳐놓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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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이미 세련되어진 현대 축구를 구사하는 두 팀이 더 이상은 '한일전'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축구 '한일전'의 의미가 퇴색된 것은 아닌지 겁이 난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점을 빼는 모험

피부에 발진이 생겨 땀띠인가 하고 피부과를 가니 버섯 종류를 잘 못 먹었단다.
주사와 약이 꽤 잘 듣는 듯 해 다음날 다시 피부과를 찾았다가...
어차피 약 때문에 술도 마시면 안되는 김에, 점이나 빼버리자 생각했다.

무려 35만원을 불렀지만, 뭐, 일단 각오하고 있던 바였고,
시간을 잡을까 생각도 했지만, 오래 생각해서 더 나은 결론을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운동을 하려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땀을 흘려선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래 난 대로 사는 것을 좋아할 뻔 하였는데,
사실 사람이 점을 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끔은 불쌍하게 이타적인 녀석을 위해 돈을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쨌건 다시 움직이기로 했으니 철저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봐야지.
그리고 프로젝트를 더 빨리 잘 끝내는 것이 좋겠다.

점들이 깔끔하게 빠졌으면 하고 바래본다.

2011년 8월 3일 수요일

KTX의 소감? 유감?

KTX 처음부터 짜증이 난다.
자동발매기를 이용하는게 빠르다고 해서 사용했는데,
틀림없이 좌석이라고 해서 늦은 시간의 표를 끊었음에도 "자유석"으로 나온다.
또한 더 빠른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나온다.

KTX를 사용하고, 무엇보다 빨리 떠야 한다면, 그냥 사람에게서 발권을 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켁, 게다가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도대체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음... 그래도 일단 오르고 보니 앉을 자리가 기적적으로 있는데다가...
인터넷도 각 열차마다 되는 듯 하다.
이 부분은 쓸만하다....
라고 생각했으나, 인터넷 접속하는 순간 "이용요금 안내"가 뜨는군.
휴대 노트북에서 당일 무제한 2000원. 30분 1000원 이란다.
아무래도 그냥 iPhone5 나오기 전에 아무 폰이나 질러서 테더링 이용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가장 shocking한 것은...
도대체 들어갈 때도, 열차 안에서도, 나갈 때에도 왜 표 검사를 안 하는 것인가?
표를 안 샀어도 문제없이 도착했을 것 같다.

설마 인체자동감지 + rfid표?
welcome to BigBrother's future world...

그냥 무임승차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해 두자.

계획의 의미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가 어떻게 될 것인지 계획하는 것.
저녁에 일기장에 하루가 어떠했는지 기록하는 것.
시작과 끝을 만들었으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본디 인간의 습성일 것이다.

그래서 아침회의를 하고 저녁에 정리를 하며,
주간회의를 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별 게 없지만...),
계획서를 넘기고, 결과보고를 하며,
새해맞이를 하고, 종무식도 한다.

워낙 그런 것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것들이 본래 어떤 의미였는지,
아니 그 보다는, 그것들이 어떤 느낌들을 가져다 주는지를 잊어버렸던 것 같다.

하루를 일어나서 자신이 보내게 될 하루가 어떤 것으로 채워질 것인지 느낀다는 것.
새로운 도전이 있고, 다짐이 있고, 미래가 있다는 것.
그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는 의미라는 것을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다.

물론, 반복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 역시 그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나와 같은 사람은 벗어나 있어서, 그들은 일상화 되어서 모르는 느낌.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주문하는지도 모르겠다.
무모한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상을 분해하고 재결합하며 항상 다시 발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나쁜 머리는 축복인지 모르겠다.
항상 반복이 새롭게 느껴지고, 언제든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한다.
계속 파괴하고, 다시 만들어간다. 더 새롭게, 더 나아지게.

그것이 아마 삶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