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0일 수요일

한일전이 아니었던 경기를 보고

음... 오랫만에 한일전 A매치라고 해서 daum에서 느린 windows를 참아가며 보았는데...
한일전이 아니었다.

아마도 '일본 A팀 연습경기 투어'(삿뽀로긴 하지만)라고 제목을 붙이면 될 것이다.
조광래 감독도, 박주영도, 이근호도, 구자철도 한일전이 연습경기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까먹은 듯 하다.

보통 한일전은 모두가 치열하다.
그것이 공식전이건, 친선전이고를 떠나서,
전력상 한국이 앞설 때도, 일본이 앞설 때도,
선수들의 머릿속에는 그 수 많은 압박 속에서도 '이겨야만 한다'는 의식이 있다.
그리고 '한일전'이라고 불리는 모든 시합에는 그 의식이 관중의 눈 앞에 보인다.

선수들의 불어난 몸값이나 화려해지고 미세해진 테크닉을 뒤엎는 그 투지가 바로 신들의 전쟁터와 같은 '한일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레스와 아테나가 서로 갈라져 양군을 응원하며 피로 낭자한 혈투를 벌이게 만들기에,
한일전의 한 골 한 골은 주옥과도 같고, 기억에 남는 멋진 골인 것이다.

오늘 경기는 그렇지 않았다.
피가 튀는 혈전속의 골이 아니라 일본의 여유로운 패스와 화려한 볼 컨트롤 속에 슬쩍 슬쩍 넣는 무난한 골들.
왠지 보면서 "오, 훌륭한 패스와 골이었어."라고 말하며 박수를 쳐 주고 싶은 골이었다.
한국의 아까웠던 장면들은 분명히 격렬해진 한국 선수들의 투지가 조금은 엿보이기도 했으나,
그건 아마도 3: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생겨난 "어, 한일전인데 이렇게 지면 난리날텐데..."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 처럼 보이지, '한일전'에서 나온 투지는 아니었다.
만일 구자철이 '한일전'을 뛰었다면, 틀림없이 골은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한일전'이다.

게임에서 진 것도 그렇게까지 분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왠지 '한일전'에서 진 것이 아니라, 그냥 게임에서 진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이 '한일전'을 실망스럽게 한 것은 몇 번 보았지만(이 경우, 일본 축구를 욕한다), 한국이 '한일전'을 이처럼 엉망으로 만든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아마, 일본에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한일전'을 망친 한국 축구를 개탄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조광래 감독에게 책임을 묻고 싶을 정도이다.
주장으로서 한일전의 각오를 이끌어 내지 못한 박주영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다.

일본에 메시와 호날두가 껴 있대도, 스코어 차가 5:0 이라고 해도 치열해야 마땅할 '한일전'을 다시는 한국이 망쳐놓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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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이미 세련되어진 현대 축구를 구사하는 두 팀이 더 이상은 '한일전'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축구 '한일전'의 의미가 퇴색된 것은 아닌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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