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나와 같은 사람.

논리라는 것은 세상으로 부터 배제되고 있는 썩어가는 나뭇잎과 같다.

세상에서 논리는 기득권이 노리는 비열한 수단의 하나인 것이다.

알고있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어서 그 논리가 맞지 않으면,
"그 논리"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에서의 이론적인 증거 이지만,
그것으로 더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가혹하게도,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혹은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마치 레 미저러블의 순경과도 같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세계가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것이 이 불쌍한 인간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다.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고, 도무지 왜 논리적 오류를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사람이 그것이 옳다 하고, 그것이 옳은가 보다 할 뿐이다.

문제는 내가 그 바보라는 점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들은 "답을 해줄 수 없다."고 대답한다.
ok. 뭔가 내가 잘못 되었겠지만, 무엇이?
자신이 잘못 되었다고 인정을 해도, 이유는 들을 수 없다.
이유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내 어조와, 내 태도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인정해도, 여전히 그들의 이유는 알 수 없다. 말을 해 주지 않는다.
결국 그것으로, 나는 내가 어떠한 종류의 잘못을 해서, 내가 들을 수도 있었던,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를 들을 수 없다.
결국 어린아이와 같이, "넌 잘못했어.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해줄 순 없어. 그건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은 거의 전 세계적으로 옳다.
그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나라는 개인으로서는 도무지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기준으로 노래와 음악을, 인디밴드와 메이저 밴드를 구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질문은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나 역시 인정한다.
분명히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 되었다.
...
...
분명히 논리를 따지는 것은, 세상에서 잘못 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어른이라는 것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나처럼 기준을 말해 주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지진아들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그런 이들이 세상에서는 버려도 상관 없는 이들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래도 한 번 쯤은...

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정저지와에 한 표를 보내며

우리가 잊는 것은 우물 밖 개구리일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식견이 좁은 것은 인정하지만,
바다를 보고 온 개구리는 뭐가 대단할까?

나의 결론은 "둘 다 개구리"이고, 식견이 높은데 따른 어드벤티지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높은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정저지와가 세태에 따르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용의 꼬리가 되고 마는 바다를 보고 온 개구리 보다 낫지 않을까?

예를 차리는 것 역시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난 유교가 매우 practical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개구리가 어차피 개구리일 바에야 예의있는 개구리 보다는 꿈꾸는 개구리가 더 낫지 않을까?

현대적 의미에서 나는 정저지와에 한 표를 보낸다.
어차피 인간은 짧은 생을 살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게다가 심각하게도, "더 나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시점이 없다면.

시점이 존재한다면, 그 당시의 이완용은 훌륭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2012년의 시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꾸준히 이완용 같은 인간을 싫어할 것이고,
미래의 어느 순간, 이완용은 족같은 삶을 산 것이 될 것이다. (부디...)

우리는 우리가 갖고있는 시점이나, 표현으로 한 사람의 깊이를 재지 말자.
우물안의 개구리...
라는 표현은 이미 차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개성적인 삶을 존중했으면 한다.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깨달음에 대한 노력도 집착이다.

모든것을 내려 놓는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도 집착이다.

금강경에서 설하듯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고, 오직 하나 진실한 깨달음만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진실한 깨달음을 갈구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왠지 인지의 문제인 것 같다.
행위와 생각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서양학문적 습관들이 이것을 방해하거나, 혹은 오히려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어떤 경에서도 말하는 것은, "머리가 모자르면 행위해 보면 알껄~"인 듯 하다.

그것도 모자르면 어찌할까?
몇 마디 환기시키는 말이 필요하다.
이쪽은 지저스 쪽이 더 명료하다. 내가 좋아하는 말로,
"니 가족을 위해주는 것은 돼지나 개도 할 수 있다. 네 적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베푸는 것이(행위가)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깨달음이 당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게 되었을 때나 해 볼 일이다.
문제는, 자신이 적게 가졌을 때,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하는 부분이지만...

결국 사람을 아이러니컬한 상황에 밀어넣는,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가장 쉽게 얻는 방법인 것 같다는 것이다. (이 또한 아이러니컬 하다)

오래된 프로그래머들이 recursive만 들어도 흥분되듯이,
지도자들은 이런 방법의 정의와 답을 많이 내어 놓는다.
계속 자가당착에 빠지는데, 헤어나올 수 없고, 왠지 답인 것 같다... 는.

어쨌건, 집착대신 아무 생각없는 ... 필연으로? 앞으로 가야할 것 같은 길을 나아가면 될 것이다. 물론, 안되면 말고.

어쩌면 그분들은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한 것일 수 있다.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스터디는 무엇일까?

확실히 나 때는 어떤 방이나 빈 강의실에 사람이 모일 때 까지 서성이다가,
사람이 어느정도 모이면 술을 마시러 가는 거였는데...
설마 이게 여전히 study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아니겠지?

어쩌다 보니, 무언가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이 생소해 졌다.
역시 지식으로의 첫 걸음은 자신의 무지에 대해 깨닫는 것인가 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르지만,
나는 확실히 사회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뭔가 사회적인 일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범주가 새로운 일이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보통 책이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한 의존성을 벗어나는 방법을 찾으려면...,
책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된다.
(seriously...)
... 혹은 오늘 도서관을 갔다왔으니, 이전에 봤던 내용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게임에 대한 이론들을 보면,
게임은 분명히 스트레스를 받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재밌다.
빈둥빈둥 시체놀이를 하고 있으면 코티졸이 증가하지 않는데,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칼 한 자루 주으러 몰입하는 사람은 분명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결국 성취감을 느끼고 중독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터디에 적용해 보면,
일단 스터디게임을 온라인용으로 만들어서...
는 안될테니, quest가 있어야 하고, 각 개인이 그것에 도전했을 때,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 너무 쉬워서 재미없지 않을 정도의 레벨 조정이 중요한 것 같다.
또한 quest를 끝내면 뭔가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예전처럼 술을 한 잔 하는 것은 힘들고...
역시 자신감이나 pride를 prize로 하는 편이 낫다. 더 어렵겠지만...

결국, 필요한 것은...
결론이 이상하더라도, 내가 사람들을 더 잘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물론, 보통 모든 결론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쪽에서 내는 전통이었지만,
여전히 답은 적당해 보인다.
어찌되었건 왠만한 문제에서 답은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에 있다.

2012년 7월 10일 화요일

굿 윌 헌팅을 보고는...


good will hunting이라....
물론 지나치다.
수학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필즈메달을 받은 사람을 신과 동급으로 보는데,
주인공인 will hunting은 라마누잔이나 오일러를 넘어서서 신 이상이다.
(물론 종교를 갖고있는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무엇보다 9번째 지능이라고 하는 spiritual 능력까지 지녔다면... 상상포기다.
적어도 여호와나 제우스 보다는 훨씬 위쪽으로 느껴진다.

오버는 심했지만, 핵심은 짚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능력을 느끼며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며, 결국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마저 있다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천재들은 시기와 질투속에 오치코모리의 길을 걷지만서도...
....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그만큼 뛰어난, 그들의 친구로서 함께하는,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겠거니 한다.
난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는 그랬다.
나 스스로 alchemist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뛰어난 머리를 갖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했고,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수은으로 황금을 만들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을 뒤집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영화의 숀과 같은 도움이 되는 친구일 수도 없었다. 그 정도가 되려 해도 엄청난 능력이 필요했다. 숀이 충분한 천재가 아니면 will을 address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또한 분명하다.
필즈메달 수상자인 대학교수는 언제나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존재이다. 로또 1등 당첨된 사람이 항상 있지만, 자신이 아니듯이. (영화에서는 숀이 비슷한 말을 하지만...)
나 역시 천재에 끌리지만, 당연히 그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못된다.
will의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입장이지만, 그들만큼 순수한 친구도 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해야 함에도,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즐거운 finish 때문일 것이다.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이 over되어 있고, 비현실적이라 가능한 그 결론을 보는 현실의 사람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안데르센처럼 동화같은 즐거운 결론을 위해서 모든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비현실적인 확률로 스토리를 지배한다.

아, 말하자면, 현실에서는 그 천재들이 알코올 중독으로 45세 이전에 생을 마감한다. 친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비슷한 감정도 느껴보지 못하고.

우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지 못해도 노력해 가고 있는 것 처럼,
또 하나의 잊혀진 우리가 attention을 줘야 할 우리보다 나은 인류 1%도 있다.
물론 해꼬지를 위해서가 아닌...

어쨌건, 영화를 보고는, 여전히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래서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굿윌 헌팅은.

2012년 7월 4일 수요일

웹 플랫폼

facebook이나 google+, 수 많은 platform(이제는 이렇게 표현할 만 하다)들을 계속해서 알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여전히 간소한 blogger가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하루를 SNS에 쏟아 부어도 여전히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비슷한 서비스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의미가 색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다.

facebook이나 google+의 확장으로서의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이런 확장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면 괜찮겠다."
는 생각을 했지만, 아직 공개된 곳은 별로 없는 것 같다.
naver, 카카오스토리는 확장 app을 어떻게 만들지 알려주지 않는 것 같고,
잠시 반짝였던 핑글러 같은 서비스는 문을 닫은 것 같다.
nate의 사이월드용 app을 만들 수 있게 했지만,
로그인 통합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login하기도 귀찮을 정도이다.

한국의 서비스가 변변찮다고 느끼는데도 닫혀진 문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나 역시 한국 사람인가보다. 뭔가 독점적인 것을 좋아하고, 뭔가 방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조금 심하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한국에 open된 platform을 우선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페이지를 중심으로.

음... 만들어볼까?

여흥 정도는 되겠다. 성공은 자신이 없겠지만.

어쨌건 현재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욕심을 버리고 ~~를 위한 앱을 만드는 것이 프로그래머로서의 방법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