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정저지와에 한 표를 보내며

우리가 잊는 것은 우물 밖 개구리일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식견이 좁은 것은 인정하지만,
바다를 보고 온 개구리는 뭐가 대단할까?

나의 결론은 "둘 다 개구리"이고, 식견이 높은데 따른 어드벤티지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높은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정저지와가 세태에 따르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용의 꼬리가 되고 마는 바다를 보고 온 개구리 보다 낫지 않을까?

예를 차리는 것 역시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난 유교가 매우 practical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개구리가 어차피 개구리일 바에야 예의있는 개구리 보다는 꿈꾸는 개구리가 더 낫지 않을까?

현대적 의미에서 나는 정저지와에 한 표를 보낸다.
어차피 인간은 짧은 생을 살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게다가 심각하게도, "더 나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시점이 없다면.

시점이 존재한다면, 그 당시의 이완용은 훌륭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2012년의 시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꾸준히 이완용 같은 인간을 싫어할 것이고,
미래의 어느 순간, 이완용은 족같은 삶을 산 것이 될 것이다. (부디...)

우리는 우리가 갖고있는 시점이나, 표현으로 한 사람의 깊이를 재지 말자.
우물안의 개구리...
라는 표현은 이미 차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개성적인 삶을 존중했으면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