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0일 토요일

고개를 들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지만, 어린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병충해의 영향일 것이다.
난 나보다 젊은 나이의 사람이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낮추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경험상 어떤 비하의 생각이나 발언이 일을 더 쉽게 해 주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낸 사람은 그야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수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도 힘들 일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며 성공한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니까. 아니면, 그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한참 모자라는 사람도 해 낼 수 있는 일이거나.
익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마 세상이 그 정도로 썩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힘이 들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봐도 좋다. 우울할 때에는 우울한 음악이 효과가 있다. 하지만, 세상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당신이 누구든 간에, 자신의 능력을 하수구에 처박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쉽사리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익은 벼에 비유하는 사람만큼 거만한 경우가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자신이 충분히 익으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을 믿고, 적어도 젊은 나이에 억지로 스스로를 낮추려는 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은 비슷한 이유로 주변의 사람들을 낮추려고 시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우리의 주변에는 자신감이라는 에너지가 더 필요한 때이다.
자신에게도 주변의 사람에게도 믿음을 가지고 '된다'고 해야 한다.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애 마냥 걱정하거나 신경쓰는 대신에 믿고 기다려야 한다. 정말로 자신의 알량한 체면이나 동정 따위로 자신이나 주위 사람의 가능성을 죽이고 있는게 아닌지 생각 해 보아야 한다.

감히 보호나 위로를 하려들지 말고, 고개를 들어야 한다.
고개를 숙여야 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익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니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 고개를 숙여야 벼가 익는 것은 아니다.

2015년 5월 3일 일요일

현실정치

오직 바보만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겠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바보가 분명하다. 물론, 당원이 되고, 10만원 정도의 성금을 보내고, 원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당장에 뛰어들어도 되고, 현실정치이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그 이상 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는 방법은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 하며 모두 멀리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단지 모이기만 해도 이마에 불에 달군 표식을 찍어대는데(은유적으로다가...), 새누리당이 아닌 다른 당원이 되면,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과장법으로다가...)?
한 두 사람이 말했을 때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극히 억눌린 나라라는 것을 인정해야 겠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야 겠다.
아무리 그저 그런 삶을 살다 가면 그만이라지만, 소시오 패스도 나름 쓸 구석이 있는 것 처럼, 바보도 목숨을 내어 놓고 정치에 뛰어드는 데에는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내 이름과 '열사'같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으므로, 시위/집회에 참여하는 것 보다는 내가 잘 하는 쪽으로 시작을 하려고 한다. 정치 사이트 같은 것을 만듦으로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의 말을 하기가 힘든 것이 현재의 정치이다. 그저 바람처럼 떠 도는 찌라시가 여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실정치'나 '정치참여'라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 뛰어난 수 많은 사람들이 미친듯이 날뛰는 정신없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세상이고, 한국이기에. 나는 더 바보가 되어야 겠다.
난 더 이상 내 친구들이 '박근혜'나 '여당'이라는 한 마디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림자 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이왕이면 바보가 되어 보자.

...
여전히 새누리당 쪽을 더 지지하고 있는 개인적인 입장이 난처하기는 하지만, 논의가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묻히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 지금의 정부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국민들을 모욕적인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보수주의자이자, 한국을 자랑스러워 했던 한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정치에 대해 말을 하는 것 조차 두려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며 정부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눈이 나쁘다 하면,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느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앞에 어떤 사람이 앉았다.

"저기 날아가는 비행기가 KAL이었나요?"

"아, 눈이 나빠서 잘 못 봤습니다."
그는 내가 대답하자 마자 조용히 탁자에 있는 내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기 시작했다.
"왜 제걸 가져가세요?"
"아뇨. ... 전 가만히 있었는데요?"
...

아마도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보며 불같이 화내지 않는 것은,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친구들이 가끔은 나를 보며 혀를 찬다. 그렇지만 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나를 이용하려 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마음이 생기리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착한척 하거나 착해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의 입장이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
내 어린시절, 가장 충격적인 깨닳음은 정말로 열심히 만들어 내고 메소드 연기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사기가 잘 통하는 상대는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심혈을 기울인 완벽하게 논리적인 거짓말은 평범하고 멍때리는 사람을 속일 수 없었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나의 예가 '어린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믿는 사람을 속이기 어렵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전두엽이 최근에 발달한 부분이라면, 간뇌는 파충류때 부터 발달해 온 기관이다. 이성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우리의 동물적인 감각은 항상 위험신호를 보내 온다.
어쨌건, 그런 짓들(거짓말, 도둑질, 사기, 등)을 그만두고 순진한 양이 되었거나 탈을 쓴 이유는 사람의 말 보다는 사람의 감각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껴서이고, 상대방을 짧게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이다... 라고 하기는 어렸고,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

25년 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 이것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리 순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지나치게 선의로 곡해하지 않는다. 미안하게도, 나를 잘 아는 믿을 만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웃기도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대다수의 양의 탈을 쓴 사람들 역시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거나 곡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보면서도 웃어 넘기는 것일테다.
아... 물론 회사에서 계급으로 누르는 경우는 웃어 넘기고 싶지 않은데 참는 것이고.

로맨틱하지 못하게시리... 대단한 사기꾼도 대부분 대상을 이성적이고, 자신의 논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할 뿐이고, 우리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책임져야 할 작은 거짓말은 대부분 진심으로 넘어오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어린 사람들 만이 상대를 속이려 하고, 상대에게 속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음...
내일이면, 수 많은 거짓말 아티스트들이 나를 속이려 할 지도... 오해가 있었다면, 다시. 속이는 것을 모두 순식간에 정확히 파악하고 속아준다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마음을 속이며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고 하자. 그리고 단정적인 표현들은 내 의견의 일부분이고.

2015년 4월 6일 월요일

보편타당성은 타당하지 않다.

보편타당성은 타당성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아, 보편타당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현대의 사회가 이 보편타당성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또한 상대방에게 어떠한 생각을 강요하는데 이를 사용하는데 있다.

'보편타당'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다'는 말인데, 이 일반성이 현대의 민주주의와 혼동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 옳은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비틀어 예를 들자면, 항상 깨끗이 손을 씻고,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하지만, 오지나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을 때는 타당하지 않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나쁜 일이지만, 상대를 위하거나 자신이 위급 할 때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낫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 봉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삶의 질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낫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 보면,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결국 더 큰 것은 보지 못하고 눈 앞의 상황에 좋은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살인도, 도둑질도, 배임과 횡령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더 옳은 경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그런 조그마한 일탈들로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보편타당이라고 매도할 수 있다.

난 도덕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이, 가장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놓았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로 시작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 아닌 상대방의 상황에서의 타당함을 먼저 생ᅟ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무엇보다 시간에 따라, 장소와 기분,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해지지 않은 만큼 꾸준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이유는, 우리가 비록 짧은 삶을 살아가지만, 살아 있기에, 변화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만나고 살아가기에, 그것에 가장 충실하는 방법은 변화에 따라 대응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다수의 의견이나 이전에 옳았던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무엇보다 같은 질문에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보편타당성이 옳은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과는 틀리게 글로 옮기다 보니 사회적인 동의를 구하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 같다.

나즈막히 정리하자면, '사회 대신 사람을 보라.' 고 말하고 싶다.
바로 주위에 있는 사람을,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말이다.
또 세상과 통계 대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분명 고려해야 할 대상이지만,
자신은, 살아온 시간 만큼 세상과의 경험을 정리해 온 결정체라고.

어쨌건, 가능하다면 보편타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